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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몬칼럼] 시그니처 같은 소리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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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를 먹고 사는 베몬입니다. 요즘 음료계 통틀어 가장 큰 화두는 “시그니처 메뉴”인 것 같더군요. Signature란 ‘서명이나 개인 고유의 특징’을 일컫는 단어로, 실제 용례를 미루어 짐작컨대 어느 매장이나 개인의 대표메뉴를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보통 시중에 나와 있는 시그니처 음료에 대한 설명을 들어 보면 대부분 대회용입니다. 대회에 나가는 선수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만들었다는 자부심도 전할 수 있고, 그것으로 좋은 성적을 거뒀다면 전문가들이 인정한 음료라는 공적 인증의 의미도 부여할 수 있습니다. 보통 수상 경력이 있는 바리스타는 매장의 간판이 되거나 혹 자신의 매장을 차리게 되니, 선수의 시그니처 메뉴란 곧 매장을 대표하는 메뉴의 의미도 될 수 있겠습니다.

이런 마케팅은 필요하긴 합니다. 경험재는 일단 구입하면 되돌릴 수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뭔가 믿을 만한 신호를 찾거든요. 비록 그것이 전혀 근거가 없다고 해도, ‘느낌적인 느낌’으로라도 확신을 얻고 싶어합니다. 그러니 사장님이 나와서 ‘별이 다섯 개’를 외치는 거고, 별로 호감 가지도 않는 얼굴이라도 굳이 내걸고 ‘따봉’을 해 주시는 겁니다. 이를테면, 이름을 팔고 얼굴을 팔아서라도 신뢰를 사겠다는 뜻이죠.

도무지 신뢰라는 걸 주고 받아 본 적이 없는 사회가 또 우리 한국사회 아니겠습니까. 사실 우리야 ‘주민등록번호’라는 전인격적 제도를 마련해 놓고 선뜻 세계인과 함께 신분을 돌려 쓸 만큼 대범한 민족이니 잘 모르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서명이라고 하면 문서에서 자신의 신분을 나타내는 거의 유일한 수단입니다. 그러니 ‘시그니처 메뉴’라는 건 인감도장만큼 중요한 자체 인증의 의미를 가지고 있고, 좀 과장하면 매장 이름만큼 중요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문제는 이게 과연 얼마만큼 대표성이 있냐는 겁니다. 대부분 대회용으로 만든 메뉴는 한정된 시간 동안 한정된 테이스팅을 거쳐 내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름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고는 하지만, 급조되는 경향이 있지요. 두고두고 잘 팔리는 것보다는 대회 당일 심사위원들을 만족시키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꾸준히 판매되는 스테디 메뉴와는 출발점 자체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그니처 메뉴라기 보다는,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시즌 창작음료에 가깝죠.

그도 그럴 것이, 무슨 시그니처 메뉴가 때마다 계속 바뀌고, 어느 시즌에는 여러 개가 나오기도 하니 말입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다들 시그니처, 시그니처 해 대는 통에, 그리 특징도 없는 음료들이 마구잡이로 탄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SNS계정 프로필사진 바꾸듯 수 많은 시그니처 메뉴가 가볍게 왔다가 사라지는 걸 보고 있으려니, 과연 이 사람들이 시그니처란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는 하는 건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이게 습작이지, 무슨 대표작이라는 건가요.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매장들이 이런 행태를 계속한다면, 이 ‘시그니처 메뉴’라는 멋들어진 표현의 약빨도 얼마 가지 않아 다 떨어지고 말 거라는 정도는 알겠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서로 신뢰를 주고 받아 본 적이 없으니, 그저 한 철 뒤통수 치고 팔아 먹으면 그만인 걸까요? 신뢰를 얻어 본 적이 없어서, 신뢰를 잃는 것이 얼마나 값비싼 대가를 치르는 것인지를 모르는 걸까요?

마케팅의 시대가 가고 브랜딩의 시대가 왔다고 합니다. 마케팅은 자신이 주장하는 것이고, 브랜딩은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 진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마케팅은 마케터가 하지만, 브랜딩은 다만 매니저가 관리할 뿐입니다. 시그니처 메뉴는 만들어 내는 메뉴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메뉴가 어느 순간 바리스타나 매장 브랜드와 연결되면서, 사람들의 인지를 통해 자연스럽게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오랜 시간 사랑 받는 메뉴로 남도록 노력하다 보면, 나의 다음 대에서나 비로소 결실을 맺는 것이 브랜드이고 시그니처인 것이지요.

딱 SNS 프로필 사진만큼 값싼 유행 속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널리 사랑 받는 대표메뉴의 탄생은 더더욱 기대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오랜 시간과 꾸준한 노력이라는 뻔한 이야기는 대체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걸까요. 사실 이 시그니처 메뉴라고 할 만한 것들은 오히려 여러분이 백안시해 마지 않는 프랜차이즈 브랜드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습니다. 스타벅스 프라푸치노와 버거킹 와퍼를 먹으면서, 시즌마다 뜨고 지는 신메뉴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 많은 메뉴들 중에 메인 메뉴판에 정착하는 메뉴가 얼마나 적은지 눈 여겨 보신 분들은 정말 없으신가요?

 

 

Written by 베몬

평소에는 온순하나 음료에 대한 잘못된 상식을 마주할 때면 지옥불과 같은 분노를 뿜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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