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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료와 인물] 4. 존 매튜 – 소다파운틴

음료와 인물

지금 우리가 마시는 음료는 오랜 역사 동안 많은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발전해 온 결과물입니다. 현대 음료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탄산음료와 탄산수는, 인류가 막 공기에 대해 알아내기 시작하던 18세기 화학의 산물입니다. 조셉 프리슬리 이후 많은 사람들이 탄산음료의 효율적 제조와 판매방법에 대해 고민했고, 이들의 상업적 노력이 탄산음료의 대중화를 이끌었습니다.

 


 

4. 탄산수 제조기 Soda fountain

 

존 매튜의 1854년 소다 파운틴 개념도
존 매튜의 1854년 소다 파운틴 개념도

 

조셉 프리슬리의 인공 탄산수 제조법이 알려진 이후, 많은 사람들이 이 시장에 뛰어들었습니다. 당시에는 천연 광천수의 의학적 효능과 치유력을 믿는 사람들이 많았고, 여기에 몸을 담그면 병이 낫는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경향은 유럽의 문화적 자손과 같은 미국인들에게도 이어졌습니다. 유럽에는 프랑스, 영국, 독일 등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소수의 광천이 존재했는데, 19세기 초 미국에서는 수 천개의 광천과 온천이 한창 개발 중이었습니다.

한창 대도시로 유래 없는 성장을 지속 중이던 뉴욕에서는 Vichy나 Kissingen, Seltzer water 등 유명 수입 광천수가 소매상점이나 약국에서 판매되고 있었습니다. 이 영험한 샘물은 매우 인기가 높아 충분한 수요가 있었으나, 사실 병에 물을 담아 유통하는 문제는 쉽지 않았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압력을 버티지 못한 병이 터져버리는 문제였습니다. 또한 운송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19세기에는 무게 때문에 광천수의 운송비용이 너무 높았고, 때문에 물이 나는 일부 지역에서만 홈메이드 광천수를 판매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인공 탄산수는 이러한 유통의 한계를 뛰어 넘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도심지에서 바로 생산이 가능하다는 점이었습니다. 이 기발한 생각을 가장 먼저 했던 것은 미국 예일대의 화학교수였던 Benjamin Silliman 이었습니다. 그는 1806년 인공 탄산수 제조기를 구입해 즉석에서 제조한 탄산수를 판매했고, 이 ‘소다 파운틴(Soda fountain)’ 판매방식을 뉴욕에서도 선보이게 됩니다. 다만 곧 경쟁자들이 대거 등장했고, 실리먼 교수는 이 사업을 이어가지 못했습니다.

영국인 John Matthews가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뉴욕에 도착한 것은 이 소다 파운틴 개발경쟁이 한참 진행되고 있던 1832년이었습니다.

 

 

존 매튜 John Matthews (영국, 1808~1870.1.12)
존 매튜 John Matthews (영국, 1808~1870.1.12)

 

존 매튜는 여러 면에서 경쟁자들을 뛰어 넘는 기발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소다 제조기 원리는 동일했습니다. 주철로 만든 통에 석회 가루와 황산(당시에는 vitriol oil)을 넣어 반응을 일으키고, 여기서 생성된 가스를 물에 통과시켜 정류한 뒤, 차가운 물이 가득한 다른 통에 주입합니다. 30분 정도면 가스가 물에 녹아 들었고, 여기에 연결된 꼭지(tap)를 열면 탄산수가 나오게 되어 있었습니다. 매튜는 이 과정에서 유럽 특허에 있는 탄산칼슘(분필)을 사용하지 않고, 당시 뉴욕의 성 패트릭 대성당 건축에 사용되고 남은 대리석 조각을 가져다 쓰면서 원료 비용을 크게 절감하게 됩니다.

한편, 원래 인공 탄산수는 약용 광천수의 대체재였습니다. 때문에 약국 등에서 판매됐고, 광천수의 맛을 흉내내기 위해 인공탄산수에 중탄산나트륨(베이킹소다)과 주석산 등을 첨가하기도 했습니다. 1807년 Henry Thompson이 탄산수 제조에 관한 영국 특허를 취득하면서 중탄산나트륨의 이름을 따서 Soda water라고 부른 것은 이러한 관행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매튜는 소다를 약이 아닌 음료로 보고, 당시 유행하던 선술집(tavern)에 자신의 소다 파운틴을 밀어 넣었습니다.

특히 그는 상업적 수준에서 전용 시럽을 개발하기 시작합니다. 인공 탄산수에 과일주스를 섞어 맛을 내는 시도는 그 전부터 있었지만, 이제는 소다 파운틴 장비를 공급하는 원청 제조사가 직접 시장을 주도하게 된 것입니다. 루트비어나 진저에일 등 발포 양조주를 흉내 낸 탄산음료가 등장한 것도 이 시기였습니다. 자연스럽게 시럽과 탄산수 등을 섞어 음료를 만들어 주는 Soda jerk라는 직업도 생겼는데, 일종의 소다 파운틴 운용 바리스타였습니다. 존 매튜는 소다 파운틴을 통해 소프트 드링크 시대를 열었던 것입니다.

 

 

초기 소다 파운틴의 모습
초기 소다 파운틴의 모습

 

소다 파운틴은 소프트 드링크 시대를 연 획기적인 시도였다. 그러나 전문 인력(soda jerk)과 설비가 필요한 사업이었고, RTD와 전문 프랜차이즈, 자동 디스펜서의 등장에 밀려 사라졌다.
소다 파운틴은 소프트 드링크 시대를 연 획기적인 시도였다. 그러나 전문 인력(soda jerk)과 설비가 필요한 사업이었고, RTD와 전문 프랜차이즈, 자동 디스펜서의 등장에 밀려 사라졌다.

 

매튜의 제조사는 경쟁에서 살아 남았고, 소다 파운틴을 사용한 소프트 드링크가 널리 대중화되면서 존 매튜는 “The Soda Fountain King”이라는 별칭을 얻게 됩니다. 1836년 뉴욕에는 소다 파운틴을 갖춘 매장이 670개소 이상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의 사후 1891년에는 소다 파운틴 최대 제조사였던 Tufts, Puffer, Lippincott, Matthews가 연합해 American Soda Fountain Company를 설립합니다. 아메리칸 소다 파운틴은 독점적 지위를 누리면서 크게 성장했고, 가격을 탄력적으로 조정하며 경쟁자의 진입을 차단한 덕분에 2차 대전 무렵에는 전체 시장의 50%를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20세기 들어 소프트 드링크는 미국의 주요 문화 중 하나가 되어, 다름 아닌 유럽에 flavoured seltzers로 역수출되기 이릅니다.

소다 파운틴은 오닉스 같은 고급 석재와 황동, 심지어는 금으로 화려하게 치장되어 호텔바 등에 설치됐고, 한편 약국이나 선술집의 소다 파운틴은 음료 브랜드 광고판을 달기 시작했습니다. 최신 냉장 기술도 적용되어 제조효율이 높아졌을 뿐 아니라, 소프트 드링크 메뉴가 늘어나면서 아이스크림 가게나 백화점, 식당, 기차역 등에도 소다 파운틴이 설치됩니다. 아이스크림 소다나 선데(sundaes) 등도 이 시기에 탄생했습니다.

 

 

약국에서 소다 파운틴으로 음료를 제조하는 모습. 소다 파운틴 광고판에 붙은 코카콜라 로고가 인상적이다.
약국에서 소다 파운틴으로 음료를 제조하는 모습. 소다 파운틴 광고판에 붙은 코카콜라 로고가 인상적이다.

 

소다 파운틴은 본격적인 소프트 드링크 바 문화를 주도했다는 점에서 카페의 에스프레소 머신에 비교할 만 하다.
소다 파운틴은 본격적인 소프트 드링크 바 문화를 주도했다는 점에서 카페의 에스프레소 머신에 비교할 만 하다.

 

소다 파운틴 문화의 정점이었던 1950년대 이후, 미국에서는 자동차가 대중화되면서 문화의 양상이 바뀌게 됩니다. 소다 파운틴을 구입해 사용하던 대형 약국 체인이 독자 노선을 걷기 시작하고, Soda jerk가 만들던 아이스크림을 제품화 한 전문 체인들이 생겨나 시장을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병입 기술이 발전하고 캔음료가 유통된 것이 결정적이었습니다. 디스펜서는 음료 제조사가 완제품 RTD팩을 넣어 소비자가 직접 받을 수 있도록 바뀌었고, 소매점들이 간편한 소다 디스펜서를 선택하면서 노동집약적인 소다 파운틴 사업은 사양길에 접어들게 됩니다.

 

Written by 김준기

베버리지 아카데미 에디터
"배워서/남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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