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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히또 이야기 2. 럼의 이해

The Bar BERMU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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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레시피의 바다에서 정확한 좌표를 제공하는 것은 ‘재료’ 뿐이다. 재료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모든 행위는 흉내내기에 그치고 만다. 이 책은 정답을 적은 교과서는 아니다. 그보다는, 그동안 버뮤다가 항해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는 버뮤다의 대표 메뉴가 된 모히또의 해체와 재구성을 통해, 재료의 이해가 실제 바의 운영에서 어떻게 활용되는지를 보인다.

모히또의 해체와 재구성

The BERMUDA itawon
글 김준기, 홍태시 / 감수 베버리지 아카데미 / 제작지원 더 버뮤다(BERMUDA)

 

 

2. 럼(Ron/Rum/Rhum)의 이해

럼의 탄생은 설탕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럼을 잉태한 것은, 사탕수수를 설탕으로 가공하는 과정에서 남은 당밀(molasses)이다. 럼이 탄생할 무렵의 유럽은 온통 설탕에 중독되어 있었고, 설탕을 만들고 남은 당밀은 신세계에 잔뜩 남아 있었다. 이 술은 노예 플렌테이션이라는 슬픈 풍요의 부산물이며, 모든 것에서 필요를 만들어 내는 인류 특유의 업사이클 능력이 발현된 사례다.

 

 

설탕이 이끈 세계 식민사의 시작

11~12세기의 중세 유럽인들은 동방과의 계속되는 전쟁, 그리고 교류를 통해 잃어버린 로마의 풍요를 조금씩 재발견하고 있었다. 1차 십자군(1096~1099)은 원정 과정에서 만난 아랍 상인들의 캐러반에서 ‘Sweet salt’를 발견한다. 그래서 설탕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096년, 유럽에 설탕이 들어온 시기는 1099년이다. 당시 십자군 전쟁에 깊이 관여하며 성장하던 베네치아는 이 때부터 거의 5백년 동안 설탕 유통을 독점하게 된다.

동방의 설탕은 상당한 고가품이었다. 육로로 이동하면서 여러 번 통행세가 붙었기 때문이다. 지중해에서 소금과 노예 교역으로 성장한 베네치아는 곧 원정으로 개척한 교역로를 독점해 막대한 이윤을 만들어 내기 시작한다. 문헌 다수가 1319년 런던의 설탕 가격에 대해 ‘파운드 당 2실링’으로 적고 있는데, 이는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1kg에 100달러 정도다. 당시 설탕은 차라리 의약품에 가까웠고, 왕가나 귀족의 고급 차문화에 사용될 뿐이었다.

중간 무역으로 엄청난 부를 독점하던 베네치아의 독주가 깨진 계기는 포르투갈의 항로 개척이었다.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는 1498년 해로를 통해 인도 설탕을 직접 수입해 오는데 성공했고, 곧 리스본에서도 설탕 유통이 시작됐다. 한 번 설탕의 맛을 본 유럽인들은 더 많은 설탕을 더욱 저렴하게 소비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동방 항로는 너무 멀고 비효율적이었기 때문에, 늘어난 수요를 감당하기엔 충분하지 않았다. 유럽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할 수 있는 땅도 지중해 주변으로 한정적이었으므로,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동방의 향신료 수입에만 열을 올리던 초기 탐험가들과 달리, 이 시기 유럽인들은 개척지의 활용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 기존 항로를 포기하고 무모하게 대서양을 건넌 콜럼버스(Cristoforo Colombo)가 1493년 그의 ‘서인도 제도(West Indies, 지금의 카리브해)’에 도착하자마자 한 일이 사탕수수를 심는 것이었다. 포르투갈 역시 1502년, 서인도 항로의 초입이었던 아프리카 연안의 마데이라(Madeira) 섬과 카나리아 제도(Canary islands)에 사탕수수를 심었다.

마데이라와 카나리아 제도에서 시작된 설탕 산업은 일종의 테스트였다. 여기서 발명된 시스템이 바로 ‘플랜테이션(Plantation, 식민농장)’이다. 플랜테이션이 성립하려면 적정 기후와 좋은 토양 뿐 아니라 노예 노동시장 개척, 현지 경제조직 개발, 기술 이전 등이 필요했다. 이곳에서 처음 운용된 식민화 프로세스는 반 세기가 채 지나기도 전에 브라질과 카리브해를 비롯한 아메리카 대륙을 아우르는 이른바 ‘신세계(new world)’ 전역에 이식된다. 플랜테이션 경제가 자리잡는 데는 백 년이면 충분했다. 브라질에 사탕수수가 처음 이식된 것은 1516년이며, 상업적 생산을 시작한 것은 1550년이다.

이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대서양 연안의 노예제 수립과, 최대의 수익을 낼 수 있는 설탕 산업의 건설이었다. 17세기에 이르면 브라질의 설탕 산업은 동인도 회사의 근간이 된다. 1612년 브라질 Pernambuco의 설탕 생산량은 14,000톤이었으며, 40년대에 들어오면 연간 24,000여 톤을 꾸준히 유럽으로 수출하고 있다. 이런 성장은 노예와 착취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17세기 대서양에서는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구입해 서인도 제도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노역을 시키고, 생산한 설탕과 럼을 유럽으로 보냈으며, 여기서 생긴 수익으로 다시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구입해 오는 삼각무역이 형성되어 있었다.

 

 

스페인 침략자들은 자메이카섬 북부에 처음 상륙하여, 자신들의 익숙한 도시명(세비야)을 따 'Sevilla la Nueva'라고 했다. 그림은 누에바 세비야의 설탕 공장의 모습을 스케치한 것으로, 사탕수수 줄기를 맷돌에 넣고 즙을 짠 뒤 가열하는 공정이 잘 나타나 있다. Lebrecht Music and Arts Photo Library 소유, smithsonianmag.com의 관련 기사에서 따온 것.
스페인 침략자들은 자메이카섬 북부에 처음 상륙하여, 자신들의 익숙한 도시명(세비야)을 따 ‘Sevilla la Nueva’라고 했다. 그림은 누에바 세비야의 설탕 공장의 모습을 스케치한 것으로, 사탕수수 줄기를 맷돌에 넣고 즙을 짠 뒤 가열하는 공정이 잘 나타나 있다. Lebrecht Music and Arts Photo Library 소유, smithsonianmag.com의 관련 기사에서 따온 것.

 

럼의 기원에 관한 전설

럼의 발생에 관한 몇몇 전설들은, 플랜테이션 농장의 노예들이 설탕 정제 후 남은 폐당밀을 가져다 럼을 만들었다고 적고 있다. 이것은 꽤 그럴듯한 설명이기도 하고, 실제로 럼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장소와 시기가 식민시대의 서인도 제도임은 부정할 수 없다. 기록 중에는 바베이도스 식민 영주가 1651년에 남긴 “…Rumbullion, alias Kill-Devil, and this is made of sugar canes distilled…”라는 문장이 가장 유명하다. 그러나 이 전설에는 약간 곱씹어 볼 부분들이 존재한다.

당밀은 설탕 정제의 부산물이다. 설탕을 정제하기 위해서는 우선 수확한 사탕수수 줄기에서 즙을 내어 사탕수수 주스를 모은다. 여기에는 15~20%의 수크로스 당과 1~2%의 환원당, 미량의 미네랄과 질소화합물이 포함되어 있다. 이를 끓였다가 천천히 식히면 수분이 증발하면서 설탕의 일부가 결정화된다. 이 과정을 세 차례 반복하여 최대한 설탕 결정을 뽑아내는 것을 설탕 정제라고 한다. 결정에서 씻어낸 나머지 물질들은 점점 농축되어 찐득하고 어두운 색상의 시럽이 되는데, 이것이 당밀이다.

당밀을 뜻하는 Molasses는 그리스어로 꿀을 뜻하는 mellas에서 왔다. 한자어도 마찬가지로 糖蜜이라고 한다. 설탕 꿀, 부연하자면 ‘설탕을 만들 때 나온 꿀’이다. 사실 당밀 자체는 유럽인들에게 전혀 생소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스인들은 이미 과일즙을 졸인 시럽(Petimezi)을 만들어 활용하고 있었으며, 1/3 가량 졸인 것을 hepsema, 1/2 가량 졸인 것을 defrutum, 2/3 가량 진하게 졸인 것을 carenum으로 구분하고 있었다. 주로 포도를 사용했고, 대추와 무화과, 멀베리, Carob 등의 즙도 사용했다. 지중해를 두고 교역했던 이집트에서도 오랫동안 사탕수수 당밀을 사용했다. 설탕이 대량생산되기 전까지, 당밀은 훌륭한 감미재였다.

16세기 이전까지 동방에서 설탕을 수입해 오는 동안, 무겁고 보관이 어려운 당밀이 전혀 교역품으로 취급 받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은 육로 운반의 어려움 때문이지, 실제로 당밀이 폐기물이었기 때문인지는 확실치 않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정제기술로는 당밀에 상당한 양의 당분이 잔류했기 때문에, 이 달콤한 시럽이 사료나 폐기물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유럽의 경제상황 역시 식재료를 쉽게 버릴 수 있는 환경이 전혀 아니었다. 당연히 당밀을 활용한 쿠키나 파이 레시피도 존재하며, 당밀을 발효하거나 맥주 양조에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따라서 설탕을 정제하고 남은 ‘폐당밀이 골칫거리였다’거나 ‘강에 부어버렸다’와 같은 극단적인 묘사들은, 과장 혹은 사탕수수 생산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처리량의 격차가 벌어진 몇 년 동안에 한정된 것일 수 있다. 물론 당밀이 럼의 제조에 본격적으로 사용된 시점은 분명 설탕 생산량이 급증하여 당밀이 ‘골칫거리’에 가까울 정도로 다량 생산되기 시작할 즈음이었을 것이다. 식민 플랜테이션의 생활상에 대해 기록한 사료가 없기 때문에, 럼을 둘러싼 전설에서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는 부분은 매우 적다. 카발칸테의 말처럼, 많은 연구들이 증거 없는 사실에 대해 수 많은 추측들을 쏟아내고 있는 상황이다.

카발칸테(Messias S. Cavalcante)는 그의 책 “A verdadeira história da cachaça(까샤사에 대한 진짜 이야기)”에서, 기록된 최초의 럼은 1622년 브라질에서 생산됐을 뿐 아니라, 브라질에서는 이미 이전부터 사탕수수주(Cachaça)을 만들었다는 수 많은 관련 기록들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까샤사는 오늘날 브라질인들의 일상에 스며들어 뗄레야 뗄 수 없는 국민주이며, 오늘날 가장 큰 규모의 럼 생산지 역시 미나스 제라이스의 Salinas시다. 그의 주장이 우리의 추론에 가장 잘 들어 맞는다. 브라질은 설탕 플랜테이션 중에서 가장 대규모였고, 17세기 초반 생산량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정황을 종합해보면, 아마도 농장 노예들이 당밀을 일종의 급여로서 받아가 일부를 먹고 일부를 발효시켜 음용했을 것이고, 이런 풍경이 럼의 기원으로 각색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초기에 생성된 당밀들은 양이 많지 않았고 설탕의 부가가치가 상대적으로 워낙 높았으므로, 본국으로 들어간 당밀은 기껏해야 선원들의 개인 소지품 정도였을 것이다. 아마 16세기 내내 대부분의 당밀은 식민지 내에서 소비됐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17세기 들어서 설탕 생산량이 급증하자 당밀의 생산량도 늘었고, 식민 정부는 이를 처리할 새로운 프로세스를 필요로 하게 된다.

 

 

다양한 럼은 역사적 배경에 의해 크게 세 가지 스타일로 나뉜다. 이는 사탕수수 식민지의 역사와 관련이 깊다.
다양한 럼은 역사적 배경에 의해 크게 세 가지 스타일로 나뉜다. 이는 사탕수수 식민지의 역사와 관련이 깊다.

 

세 가지 스타일의 럼

애초에 사탕수수로 술을 빚는 것이 전혀 생각치 못할 일은 아니었다. 인도와 중국에서는 사탕수수 주스로 발효주를 만들어 마셨고, 동남아인들이 사탕수수 양조주인 Brum을 즐겨 마셨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마르코폴로는 아덴항을 지나 Esher에서 사라센들의 생활양식을 묘사하면서 “They have no wine of the vine, but they make good wine from sugar, from rice, and from dates also”라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유럽인들도 사탕수수 즙을 발효해 술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사탕수수 즙은 귀중한 재화인 설탕의 원료다. 이미 와인과 맥주 등 발효주를 오랫동안 음료로 음용해 왔고, 르네상스기를 지나며 다양한 증류주들을 만들고 있었던 유럽인들이, 굳이 사탕수수 즙으로 술을 만들려 했을리 없다.

당밀은 무게의 50~75% 가량이 당분으로 이뤄진 고농축액이므로, 약간의 물과 일단 발효된 이스트만 있으면 쉽게 발효시킬 수 있다. 플랜테이션의 노예들은 안전한 음용수가 필요했으므로, 처음부터 남은 당밀을 양조해 마셨을 것이다. 그러나 유럽인들에게는 포도주가 있었고, 굳이 노예들이 마시는 술에 관심을 갖지는 않았을 것 같다. 마침내 당밀을 어떤 식으로든 상업적 규모로 처리해야 할 상황이 되었을 때, 유럽인들이 굳이 양조주-증류주의 발전 단계를 거칠 필요는 없었다. 증류 럼은 당밀의 처리량을 높이고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이었다. 이 시기 럼을 Industrial Rum, 혹은 Colonial Rum으로 분류해 볼 수 있다.

럼이 막 태동할 16~17세기 무렵, 대서양을 지배하던 최강대국은 에스파냐(스페인)다. 기실, 대항해시대 자체가 이베리아 반도에 있던 에스파냐 왕국의 통합과 근대화에 의해 시작됐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신세계를 점령한 에스파냐 제국과 합스부르크 왕가는 강력한 함대를 바탕으로 유래 없는 황금기를 누렸다. 1588년 아르마다 함대가 영국에 패배했음에도 불구, 이즈음 펠리페 2세는 포르투갈 제국까지 통합하면서 “태양이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하고 있었다. 에스파냐는 17세기 후반에 이르면서 쇠락의 길을 걷게 되지만, 식민통치는 19세기까지 이어진다.

에스파냐에서는 럼을 Ron이라고 불렀다. 카나리 제도와 그레나다 등 스페인령 외에도, 스페인의 지배 아래 있었던 쿠바, 푸에르토리코, 도미니카 공화국, 멕시코, 엘 살바도르, 베네수엘라, 과테말라, 니카라과, 파나마, 페루 등 캐리비안 중남미 국가에서 여전히 Hispanic Ron을 생산한다. 대체로 당밀을 그대로 양조하여 증류한 럼으로, 설탕을 첨가해 풍미를 내는 경향이 있으며, 에스파냐에서 셰리나 브랜디를 만들 때 사용하던 배럴 숙성(criaderas y soleras) 방식으로 만든다. 이런 럼들을 Spanish style로 분류한다. 모히또 등 쿠바의 칵테일은 대체로 스패니쉬 스타일의 럼을 사용하며, 특히 라이트 럼은 시트러스와 잘 어울려 칵테일에 많이 사용하는 편이다.

 

이 시기 잉글랜드(영국)는 계속된 탐험 실패와 16세기 내내 이어진 종교개혁으로 식민 쟁탈전에 전혀 뛰어들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존 호킨스나 프랜시스 드레이크와 같은 사략해적이 꾸준히 에스파냐 제국 항구들을 약탈했을 뿐이다. 마침 1581년, 에스파냐 제국의 핵심이었던 네덜란드가 에스파냐로부터 독립선언을 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에스파냐는 네덜란드에 대한 무역봉쇄로 실력을 행사하며 독립 시도를 막아서는 중이었다. 그런데 잉글랜드가 이 조치에 응하지 않고 네덜란드와 교역을 계속하며 독립을 지원하자, 마침내 에스파냐 제국과 잉글랜드 간 본격적인 갈등이 시작된다.

사실 이 대결구도 자체가 당시 정세에서 놀라운 풍경이긴 했다. 종교개혁을 막 마친 잉글랜드는 유럽 변방의 2등 국가였고, 에스파냐는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는 대제국이었다. 에스파냐는 네덜란드 독립을 막기 위해 잉글랜드를 눌러야 했는데, 양국간 격차가 너무 커서 전쟁에 명분이 없었다. 마침 종교개혁으로 독립한 신교 세력의 확장은 유럽 내 카톨릭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펠리페 2세는 저 신교국가로부터 카톨릭을 수호한다는 명분을 들어, 이 침공의 성격을 ‘성전’으로 바꾸는 데 성공한다. 결국 1588년, 에스파냐는 당시 중세인들이 “세상이 생겨난 후로 가장 큰 함대”라고 칭송한 아르마다를 끌고 잉글랜드를 침공했다가 참패하고 만다.

이것은 역사의 전환점이다. 에스파냐는 이후로도 몇 차례 더 대함대를 만들어 잉글랜드를 공격했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계속되는 원정으로 국력을 소진했다. 제해권을 잃은 에스파냐가 마침내 1604년 런던 조약으로 적대관계를 청산하면서, 잉글랜드는 단숨에 주요 세력으로 급부상했다. 잉글랜드는 네덜란드와 함께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고 아시아 무역을 독점하고 있던 포르투갈에 대항하며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를 기반으로 18세기에는 스코틀랜드를 통합하면서 Great Britain이 되었고, 19세기에는 저 유명한 ‘대영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영국 함대가 대양을 누비던 시기의 럼은 Naval Rum으로 분류해 볼 수 있다. 영국의 지배에 있던 자메이카, 바베이도스, 트리니다드&토바고, 버뮤다, 브리티시 기아나 등에서 생산하는 럼들이 대체로 잉글리시 스타일로 분류된다. 잉글리시 럼은 당밀이나 사탕수수 주스를 두 번 증류하여 만들며, 향신료와 카라멜(설탕)을 첨가해 매우 선명하고 향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잉글리시 럼의 특징은 영국 해군이 럼을 활용한 방식과 연관이 있다.

영국은 사략선 시절부터 럼과 밀접한 관계였다. 럼은 그 자체로도 훌륭한 교역품이었고, 노예상이나 해적이 연관된 식민무역에서 통화로 기능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럼은 선원들의 식수원이기도 했다.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항해는 상당량의 식수를 필요로 했는데, 통에 담아둔 물에는 금방 조류(algae)가 자라나 역한 냄새를 풍기곤 했다. 이 물을 마실 수 있도록 맥주나 와인을 섞어 마시던 풍습이 체계화되어, 선원들의 배급품(ration)으로 럼이 등장하게 된다. 잉글리시 럼을 만들 때 향신료를 첨가해 강한 향을 내는 이유다.

원래 Royal Navy에서는 하루에 1갤런의 맥주를 지급했으나, 항해가 길어지면서 보급품 적재량이 늘어나자 부피가 훨씬 작고 보관이 용이한 증류주로 바뀌게 된다. 한동안 프랑스산 브랜디를 배급하던 영국은, 1655년 자마이카 섬을 정복한 이후부터 자체 생산한 럼을 배급하기 시작한다. 이 배급 럼(Rum ration)을 ‘Tot’이라고 불렀다.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95.5proof(54.6% ABV)의 럼 1/2~1/8 파인트를 정오에 나눠주었다고 한다. 교범상 물과 럼을 4:1로 섞어 마시도록 되어 있었다. 이렇게 선상에서 발전한 것이 Grog와 Bumbo다. 둘 다 물에 럼을 넣어 마시기 수월하게 만든 것인데, 영국 해군은 라임즙과 설탕을 넣어 Grog라고 했고, 해적들은 추가로 넛맥, 시나몬 등을 더 넣어 Bumbo라고 했다.

 

한편, 프랑스는 비교적 늦게 식민 쟁탈전에 뛰어들었으나, 성과는 신통치 않았다. 1603년 북아메리카 탐험을 시작으로 프랑스 역시 누벨 프랑스(Nouvelle-France)를 건설했지만, ‘7년 전쟁’에서 패하면서(1763) 많은 식민 영토를 스페인과 대영제국에 할양했을 뿐 아니라, 프랑스 혁명(1789~1793) 기간 동안 대부분의 해외 식민지를 잃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자국에서 일어난 자유와 평등의 물결이 남은 식민지 독립으로 이어져, 나폴레옹 전쟁(1796~1815)이 끝날 무렵 남은 프랑스 식민지는 프랑스령 기아나와 세네갈 정도였다.

프랑스가 2차 식민제국을 적극적으로 건설하던 19~20세기에는 이미 설탕의 대량생산 체계가 자리를 잡아 교역 재화로서의 가치가 떨어지고 있던 시기였다. 게다가 그동안 프랑스 본토에서는 설탕을 자체 생산하기 위해 사탕수수의 대체재로 사탕무(Sugar beet)를 널리 재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뒤늦게 점령한 카리브해 식민지의 사탕수수는 에스파냐나 영국의 그것과는 가치가 많이 달랐다. 비로소 사탕수수 즙을 발효해 증류한 럼이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사실 19세기는 럼이 고급화를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전까지 럼은 매우 무겁고 강한 술이었고, 사탕수수 산지도 기술관리가 되지 않아 품질이 천차만별이었다. 스페인 와인상이었던 Facundo Bacardí Massó와 쿠바의 한 지주였던 프랑스계 쿠바인 José León Boutellier가 바카디 브랜드를 만든 것이 1862년이다. 이들은 증류한 럼을 숯으로 걸러 불순물을 제거한 뒤, 화이트오크통에 에이징하여 최초의 화이트럼을 만들어 낸다. 잘 정제된 바카디 화이트럼은 10년 전쟁(1868~1878)과 쿠바독립전쟁(1895~1898), 미국-스페인전쟁(1898~1902) 이후 저 유명한 ‘쿠바리브레’와 ‘다이쿼리’를 낳는다. 스패니쉬 럼은 오늘날에도 다양한 칵테일에 기주로 쓰이고 있다.

그러나 프랑스는 자국 산업인 와인, 브랜디 때문에 처음부터 럼의 증류에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이들은 자국 주류 시장에서 럼이 브랜디와 확연하게 구분되기를 원했고, 결국 ‘알코올 외 잔류물’을 나타내는 TNA 수치를 기준으로 라이트럼 60g/TNA 이하, 전통럼 225g/TNA 이상이 되어야 한다고 법으로 묶어버려, 럼의 발전을 의도적으로 막아두고 있었다. 이 때문에 스패니쉬 럼이 발전하는 동안, 프랑스 주류시장에서 프렌치 럼(Rhum agricole)의 점유율은 계속해서 떨어지는 중이었다.

한 발 늦은 프랑스가 럼의 품질 향상과 현대화를 도모하기 위해 취한 방법은 A.O.C(Appellation d’origine contrôlée, 원산지표시제)였다. 프랑스의 지리적 표시제도는 이미 1919년부터 와인을 비롯한 일반 농산물에 적용된 바 있는데, 1990년 농업 전체로 확대 적용하면서 해외 레지옹에서 생산되는 럼에도 이를 적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따라 럼 생산자 연합이 만들어졌고, 부산물인 당밀이 아닌 사탕수수 즙으로 럼을 만든다는 부분을 홍보하기 시작한다. AOC Martinique Rhum agricole이 유명하다.

오늘날 프렌치 스타일의 럼은 Agricultural Rum으로 분류한다. 현재 프랑스 레지옹인 마르니티끄, 과달루프, 마히걀랑뜨, 프렌치 기아나, 레위니옹 등은 물론, 아이티와 모리셔스, 파나마와 도미니카, 그레나다 등 현대까지 사탕수수 경제가 계속 이어지고 있는 곳에서 프렌치 럼이 생산된다. 실제로 프렌치 스타일의 럼에도 강렬하고 날카로운 개성이 있어 다른 스타일과 비교적 구분이 되기는 하나, 특별히 프렌치 럼만을 고급으로 꼽기는 어렵다. 현대의 럼들은 원료의 관리나 제조법, 에이징 방식들이 모두 비슷한 수준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모히또를 위한 럼

럼의 스타일은 역사적 맥락에 의해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이 역사적 맥락을 만들었던 제한은 거의 사라졌기 때문에, 생산지에 따른 구분은 이제 크게 의미가 없다. 제조 방식과 원료가 개선되었으며, 각 스타일 역시 다양한 방법으로 품질이 개선되어, 지난 시대에 싸구려 취급 받던 럼도 이제는 고급화되었다. 따라서 수시로 다양한 브랜드의 럼을 구해 적극적으로 느껴보고 본인의 견해를 정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스타일에 따른 노트는 아주 주관적인 영역에 있으므로, 직접 확인해 보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럼의 스타일은 칵테일로 만들었을 때 그 차이가 더욱 확연해 진다. 예를 들어, 스파이시한 잉글리시 스타일의 럼은 마이타이처럼 ‘spiced ron’이라고 지시된 레시피에 사용한다. 잉글리시 럼은 올드패션드와 같은 미국식 버번 칵테일을 색다르게 변형할 때도 좋은 힌트가 된다. 모히또, 다이키리 같은 쿠바 칵테일에는 실제로 스패니쉬 스타일의 럼이 잘 어울린다. 특히 시트러스와의 어울림을 강조하고 싶다면 깔끔하고 가벼운 라이트럼(Blanco)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중요한 것은 칵테일 레시피의 의도와 지향점을 분명하게 파악하고 매칭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기존 모히또에 풍미를 더할 목적이라면, 스패니쉬 스타일의 숙성럼을 플로팅하고 비정제 설탕을 함께 더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

 

Written by 김준기

베버리지 아카데미 에디터
"배워서/남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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