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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료와 인물] 7. 프레데릭 튜더 – 얼음

음료와 인물

지금 우리가 마시는 음료는 오랜 역사 동안 많은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발전해 온 결과물입니다. 오늘날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던 시대에도, 더 좋은 음료를 만들기 위한 노력들이 있었습니다. 냉장고와 제빙기가 보급되기 전, 사람들은 어떻게 얼음을 사용했을까요. 음료와 인물에서 알아 볼 일곱 번째 인물은 ‘얼음왕’ 프레데릭 튜더입니다.

 


 

7. 얼음의 유통 Ice Trade

 

아바나의 바맨들은 음료에 상업 얼음을 가장 먼저 활용한 사람들 중 하나였습니다. 얼음이 처음 쿠바에 수입된 것은 1807년입니다. 얼음의 감각은 쿠바 칵테일의 발전에 있어 가장 큰 축복이었습니다. 사실 월 평균 기온이 20도 아래로 떨어질 일이 없는 열대의 카리브 해에서, 얼음은 여러모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요. 아직 냉장고도 없던 시절, 대체 쿠바에는 어떻게 얼음이 들어오게 된 걸까요.

이 엉뚱한 상상은 한 소년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프레데릭 튜더(Frederic Tudor)는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윌리엄 튜더는 하버드를 졸업하고, ‘존 아담스(2대 대통령)’의 법률 사무실에서 일을 배웠습니다. 독립전쟁 동안 조지 워싱턴의 법률 고문으로 법무관직을 수행했고, 전후에는 보스턴에서 변호사로 개업하고 메사추세츠 주의 여러 공직을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어린 튜더가 13세 되던 해(윌리엄 튜더가 메사추세츠 주의회 판사직을 마친 후인 1795~6년으로 추정), 튜더 가족은 카리브해로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무더운 카리브 해를 여행하던 소년은, 당연하게도, 보스턴의 겨울 얼음을 이곳에 판매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면, 그는 어릴 때의 꿈을 잊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프레데릭 튜더 Frederic Tudor (미국 1783.9.4~1864.2.6)
프레데릭 튜더 Frederic Tudor (미국 1783.9.4~1864.2.6)

 

23살이 되던 1806년, 그는 보스턴 찰스타운에 있던 아버지의 농장 호수에서 얼음을 떼어다가, 2,400km 떨어진 마르티니크 섬으로 향하게 됩니다. 당시 Boston Gazette지는 2월 10일자 기사에서, “이것은 농담이 아니다. 얼음을 선적한 화물선이 마르티니끄로 출항한다. 부디 잘못 생각한 것이 아니길 바란다”고 쓰기도 했습니다.

일견 무모해 보이는 그의 첫 얼음 수출은 공식적으로는 실패로 남아 있습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마르티니끄 사람들은 얼음을 처음 봤으며, 얼음이 무엇인지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3주 간의 열대 항해에서 얼음도 많이 녹아서, 그는 당시 판매액(파운드당 25센트, 현재 가치로 약 5달러) 기준으로 4,500달러의 손실을 봤습니다.

그러나 튜더는 생각만큼 무모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화물선에 함께 탑승하여 운송 과정의 문제점을 파악했던 것 같고, 대신 그의 형제와 사촌들을 카리브 제도 각 정부에 파견해 협상을 벌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마르티니끄에 도착한 그의 화물선에는 얼음이 남아 있었습니다. 즉, 그의 항해는 이 황당한 ‘얼음 무역’이 가능할거라는 증명이나 다름 없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튜더는 첫 항해를 바탕으로 쿠바 식민정부와 계약을 맺었고, 이듬해인 1807년 아바나에 3척 분량의 얼음을 수출했습니다. 초기에는 얼음이 녹는 바람에 다소 손실을 봤지만, 튜더의 새 사업은 여건이 매우 좋았습니다. 우선 당시 보스톤에 도착해서 화물을 내려놓고 돌아가는 서인도 제도 행 빈 배가 많았기 때문에 선적 비용이 매우 저렴했습니다. 겨울철 호수에서 잘라내는 얼음이 무료였기 때문에, 인건비만으로 돌아가는 사업이었습니다.

이 얼음 무역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는 보냉이었습니다. 튜더는 목재 부스러기와 톱밥, 쌀겨 등으로 얼음 외부를 감싸 단열하는 방법을 고안해 냅니다. 당시 보냉재의 주 재료로 쓰인 톱밥은 목재소에서 버리는 폐기물이어서, 이 또한 적은 비용으로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튜더의 얼음 무역은 3년 만에 수익을 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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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815년 아바나에 얼음 창고도 지었습니다. 가로와 세로가 각 6미터(20피트)에 높이 약 5미터(16피트)짜리 창고로, 150톤가량의 얼음을 저장해 둘 수 있었습니다. 아직 상업용 냉장고가 없던 당시, 얼음 창고는 얼음의 유통과 활용을 위해 필수적이었습니다. 이 얼음 창고 덕분에 66%에 달하던 얼음의 손실량은 8%로 뚝 떨어졌고, 아바나에는 상업 얼음이 안정적으로 공급되기 시작합니다. 1825년 한 해 동안 보스턴에서 수출한 얼음이 3천 톤이었는데, 그 중 2천 톤이 튜더의 얼음이었습니다.

1833년에는 인도에도 얼음을 보냅니다. 첫 항해처럼, 그는 180톤의 얼음을 싣고 26,000km 떨어진 캘커타로 무작정 떠났습니다. 4달에 걸친 항해 후 100여톤의 얼음이 인도에 도착했고, 이후 인도 항로는 20년 동안 튜더의 가장 큰 수익처가 됩니다. 튜더는 캘커타와 봄베이, 마드라스에도 얼음창고를 지었습니다.

1840년대가 되면 전 세계적으로 얼음 유통업이 크게 성장하게 됩니다. 이제 얼음은 세계 각지로 유통되는 상품이 되었고, 튜더의 사업은 아주 작은 일부분이 됩니다. 19세기 말, 미국의 얼음 유통업은 약 2,800만 달러 규모에 이르렀고, 종사자는 9만명에 달했습니다. 얼음 유통업은 주로 미국의 신흥도시에 집중되어 성장했지만, 1870년대가 되면 노르웨이에서 영국과 독일로 연간 백만톤에 가까운 얼음이 수출됩니다.

얼음 무역은 제빙 기술이 발전한 이후에도 한동안 이어졌습니다. 냉매 기화 방식은 이미 20세기 초반에 개발 됐으나, 자연에서 수확한 얼음이 훨씬 저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용 편차는 1차대전 무렵 따라잡혔고, 결정적으로 전쟁으로 인해 세계 교역량이 급감하면서, 얼음 무역도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됩니다.

 

http://tudorice.com/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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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aehistory.word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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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potsdampublicmuseum.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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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겨울철 얼음을 보관해 두었다가 쓴다는 개념이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기원 1758년 전, 유프라테스 강 유역(지금의 이라크)에서 아이스하우스(Bit Shuripim)에 관한 기록이 발견됩니다. 산꼭대기에서 가져온 얼음을 지하 깊은 창고에 보관해 두었던 것입니다. 페르시아나 로마, 이집트 등 고대 문명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인류는 오래전부터 냉방과 단열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얼음은 무료이지만, 그 시설은 권력자만의 것이었습니다. 지하 깊은 곳에 창고시설을 갖추고, 겨우내 얼어붙은 강이나 호수에서 얼음을 대량으로 떼어다가 짚이나 톱밥 등 단열재와 함께 보관할 수 있는 힘은 극소수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렇게 보관된 얼음은 주로 여름철 식품을 신선하게 보존하는 데 주로 썼습니다. 아마 일반 대중이 염장, 발효, 건조한 음식을 먹는 동안, 얼음을 가진 사람들은 비교적 신선한 식재료를 먹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즉, 아무리 얼음을 활용한 역사가 길다 해도, 일반 대중이 더운 여름철에 차가운 음료를 마실 수 있었다는 건 아닙니다. 얼음은 대개 소수의 특권이었고 고급 문화였습니다. 건축 기술이 발달하고 부의 축적이 이뤄지던 18세기 즈음, 부유하고 권세 있는 사람들은 여름철에 얼음의 차가운 맛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미국 3대 대통령이었던 토마스 제퍼슨 역시 얼음 애호가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개인 얼음창고를 두 채나 가지고 있었습니다.

필라델피아의 첫 번째 고급 호텔로 꼽히는 James Oeller’s hotel(1790)도 따로 얼음 창고를 가지고 있었고, 차가운 버터와 고기, 샐러드, 특히 얼음을 넣은 펀치로 유명했습니다. 아직도 호텔에서 차갑게 식힌 고기, 햄 등을 내놓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지난 백수십년 동안 호텔만이 할 수 있는 고급 서비스 중 하나였습니다.

즉, 단순히 얼음을 먹는 것과, 더운 여름철 차가운 음식을 먹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종종 나폴레옹의 1796년 이탈리아 원정을 아이스크림이나 소르베의 기원으로 꼽는 문서를 볼 수 있는데, 이는 사실 알프스 산을 넘는 극한의 전술을 성공시키기 위해 보급품 중 가장 무거운 식수를 버린 결과일 뿐입니다. 추운 곳에서 체온의 손실을 감수하면서 눈을 먹는 것은 생존을 위한 행동이며, 이는 선사시대부터 수 많은 사냥꾼들이 해오던 것입니다.

19세기 얼음의 상업적 유통은 이런 맥락에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1790년대까지만 해도 얼음은 부유한 저택에서 손님을 대접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불과 1830년대가 되면 얼음을 먹고 마시는 시대가 됩니다. 차가운 감각이 즐거운 미각이 되고, 이것이 대중화되는 시점이 바로 이 즈음인 것입니다. 실제로 얼음 무역을 어느 정도 궤도에 올린 튜더는, 1812년부터 보스턴 지역에 ‘냉장고’를 판매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1803년 토마스 무어(Thomas Moore)의 발명인데, 오늘날에는 ‘아이스박스’라고 부릅니다.

이 당시 냉장고는 목재 가구로, 내부에 철제 케이스가 있었고, 그 사이를 양모로 채워 단열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3파운드의 얼음을 넣어 얼음의 냉기로 내부를 차갑게 유지하고, 나머지 공간에 식자재를 보관하는 디자인이었습니다. 이 아이스박스에는 매일 얼음을 새로 넣어주어야 했기 때문에 ‘아이스맨’이라는 직업도 존재했습니다. 이들은 아이스하우스에서 받은 얼음을 마차나 트럭에 싣고 다니면서 가정이나 레스토랑, 바에 얼음을 판매했습니다.

사실 튜더가 정말 원했던 것은 거대한 유통 플랫폼이었던 것 같습니다. 얼음 무역은 상당한 수익을 냈지만, 튜더는 계속해서 새로운 시도를 하느라 늘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카리브해 얼음 무역이 한창이던 1816년, 쿠바에서 라임과 오렌지, 바나나, 배 등의 과일을 15톤의 얼음과 함께 싣고 뉴욕항에 들어옵니다. 항해 도중 과일들이 모두 썩어버려 수천달러의 빚을 졌지만, 그는 결국 사우스 캐롤라이나와 조지아, 루이지애나 주에 열대 과일을 수입합니다.

1830년대에는 커피 선물에도 뛰어들었지만, 역시 수천만 달러의 빚을 지게 됩니다. 이후 남은 여생을 얼음 무역에 매진했습니다. 얼음 무역의 수익이 충분했기 때문에 그가 빚에 쪼들리는 일은 없었습니다.

 

Written by 김준기

베버리지 아카데미 에디터
"배워서/남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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